족보
  • 노이점(盧以漸)
  • 만경노씨(萬頃盧氏),  출생~사망 : 1720 ~ 178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홍(士鴻). 호는 추산(楸山).

1720년(숙종 46)에 무과 출신의 노언준(盧彦駿)의 둘째이며 서자로 태어났다. 노이점은 그의 족형인 노이형(盧以亨)에게 글을 배웠다. 1756년(영조 32)에 37세의 늦은 나이로 병자식년사마시(丙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후 그는 장릉참봉(長陵參奉)과 한성부의 서부봉사(西部奉事)를 역임하였다. 그는 1780년(정조 4)의 사행(使行)에 수행원으로 따라가서, 그 당시의 기록을 '수사록(隨○錄)'으로 남기고 있다. 노이점은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와 시를 주고받았으며, 몽고 인인 박명(博明)과 교류하였다. 그의 '수사록'은 연암 박지원과 같은 시기의 연행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그 성격은 서로 매우 상이하다. 즉 '열하일기'가 북학파의 학문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면, 그의 '수사록'은 존명배청의식을 기조로 쓰여 졌다. 이처럼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상을 서술의 기조로 삼은 까닭은 그의 가문적인 배경과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의 4대조인 노응환(盧應晥)과 그 동생인 노응탁(盧應晫), 노응호(盧應晧) 등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인 조헌(趙憲)을 따라 왜적과 대항했는데, 노응탁은 스승과 함께 금산(錦山)에서 전사하였다. 이들은 공주의 삼의사(三義祠)와 보은의 후율사(後栗祠)에 제향되었다. 이러한 배경이 존명배청의식으로 형성되어, 그의 '수사록'의 내용이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는 거리를 두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