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행(士行). 호는 한정당(閒靜堂). 문정공(文貞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4세손으로, 조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한 송병원(宋炳遠)이고, 아버지는 송요좌(宋堯佐)이다. 생조는 원래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지낸 송병익(宋炳翼) 인데,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낸 묵옹(○翁) 송병원(宋炳遠)에게 출계하였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지낸 윤부(尹扶)의 딸이다.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는데, 형이 바로 당대의 선비로 손꼽히던 역천(○泉) 송명흠(宋明欽)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형 송명흠과 더불어 송씨의 쌍벽(雙璧)이라 불리었다. 1733년(영조 9) 계축식년사마시(癸丑式年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관직보다 학문에 더 뜻을 두어, 형과 함께 회덕(懷德)의 비래암(飛來庵)에 뜻 있은 선비들을 모아 '대학(大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1739년(영조 15) 장릉참봉(長陵參奉)에 보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그 뒤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에 임명되었는데, 조태구(趙泰○)의 아들 조현빈(趙顯彬)이 마침 세마(洗馬)가 되었으므로 더불어 동료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 얼마 후에 다시 익위사부수(翊衛司副率)이 되었으나 조현빈이 그 자리에 계속 있자 다시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 1743년(영조 19) 목곡(牧谷) 이기진(李箕鎭)이 전랑(銓郞)이 되어 맨 먼저 그를 동몽교관(童蒙敎官)에 발탁하여 일 년여 동안 재직하게 하였으나, 가르칠 어린아이들이 없어 곧 벼슬을 사양하였다. 1747년(영조 23) 종부시주부(宗簿侍注簿)에 올랐다가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으며, 다시 문의현령(文義縣令)이 되었다. 1552년(영조 28) 12월 15일, 향년 43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문집으로는 8권 4책의 '한정당집(閒靜堂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