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만성(李晩成)
  • 우봉이씨(牛峰李氏),  출생~사망 : 1659 ~ 1722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추(士秋). 호는 귀락당(歸樂堂), 행호거사(杏湖居士). 우의정 숙의 아들로, 중부(仲父)인 지평 영(翎)에게 입양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96년(숙종 22)진사로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전적, 좌랑을 거쳐, 지평 겸 지제교로 있을 때, 영의정 유상운(柳尙運)이 대제학 오도일(吳道一)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면서 오도일의 아들 봉휘(鳳輝)를 합격시킨 데 대하여 이를 반박하는 소를 올려, 마침내 그를 파방(罷榜)시켰다. 이어 교리, 응교, 동부승지, 이조참의,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706년에 대사헌 겸 승문원제조(承文院提調)를 지내고, 1709년에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어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저술한 '예기유편 禮記類編'에 주자(朱子)의 글귀를 고친 것을 논죄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삭직되었다. 이듬해 숙종이 후회하고 '예기유편'을 모두 불살라버린 다음 그를 복관(復官)시켜, 이조참판에 승진되었다. 1716년에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경종이 즉위하면서 형조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조판서로 있을 때는 전형(銓衡)을 엄정히 하고 행신(倖臣)의 폐를 막아 침체한 정사를 진흥시켰다. 노론으로서 1721년(경종 1)에 다시 병조판서가 되어 노론 대신들과 연잉군(延○君: 뒤의 영조)의 세제(世弟)책봉을 주청하여 그 실현을 보았으나, 이어 소론이 일으킨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전라도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불려와서 국문을 받다가 64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1724년에 왕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복관되었다. 영암의 죽정서원(竹亭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저서로는 '귀락당집 歸樂堂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