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태유(朴泰維)
  • 반남박씨(潘南朴氏),  출생~사망 : 1648 ~ 174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안(士安). 호는 백석(白石).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세당(世堂)의 아들이다. 평강현(平康縣) 관아(官衙)에서 태어났다.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1년(숙종 7) 태릉참봉(泰陵參奉)이 되었다. 같은해 알성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병조좌랑 등을 거쳐 경기도사를 역임하였다. 그해 가을 호조(戶曹)에서 농사일을 조사할 때, 각 고을의 일을 맡은 자들이 사실조사를 싫어하여 임의대로 한두 경우만 조사하여 그대로 보고하자, 그는 '명령을 받고 앉아서 살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모두 조사하여 부실한 보고를 한 수령 5, 6인을 파면시켰다. 조사가 끝난 뒤 각 고을의 농사피해보고가 사실과 다르고, 농사도 전년보다 잘 되지 않았으므로 세미(稅米)를 감해줄 것을 상소하여 춘추세(春秋稅)의 각 반을 감면받았다. 그해 겨울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이때 어영대장(御營大將) 김익훈(金益勳)이 역모를 밀고하였으나, 심문한 결과 무혐의로 드러났다. 그러자 지평(持平) 유득일(柳得一)과 함께, 김익훈을 탄핵하였다. 이러한 탄핵이 임금을 거슬러 거제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되었으나 곧 복직되었다. 뒤에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으나 낮은 직위에도 거리낌 없이 남병사(南兵使) 이하를 모두 탄핵하였다. 감사의 잘못도 규탄하여 감사가 스스로 사직하였다. 임금이 상관을 지나치게 규탄한다고 생각하여 평안도찰방으로 이직시키려 하였다. 원래 건강하지 못한 데다가 고산(高山)의 기후가 맞지 않아 병이 악화되자, 1745년(영조 21) 병으로 사직하였다. 효성이 지극하고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남아 있는 글씨로는 철원의 김응하묘비(金應河墓碑), 영상신경신비(領相申景愼碑), 해백박동열비(海伯朴東說碑), 길목박동망갈(吉牧朴東望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