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경(思卿). 호는 모헌(慕軒). 예문관제학 사필(士弼)의 5세손, 아버지는 병조랑 영이며, 채팽윤(蔡彭胤)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탐닉하였으며, 특히 경사(經史)에 밝았다. 1713년(숙종 39)에 생원이 되었으며, 이어 1718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그뒤 주서(注書)를 거쳐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경연(經筵)에 자주 출입하였다. 전적을 거쳐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지냈으며, 안주현감이 되었다. 1728년(영조 4) 지평으로 있을 때 이인좌(李麟佐) 등이 난을 일으켜 청주 성에 웅거한 뒤, 서울을 공략할 기미를 보이자 한강 변에 있던 경창(京倉)을 성안으로 옮길 것을 상소하는 등 여러 수비책을 제시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나, 그때 상신(相臣)이던 조문명(趙文命), 송인명(宋寅明) 등이 탕평책을 주장할 때 이에 맞서 반대하였기 때문에 관운이 순탄하지 못했다. 1751년 장령으로 호조판서 홍계희(洪啓禧)가 주장한 균역론(均役論)의 폐단을 극론하여 미움을 샀고, 그뒤 평안도관찰사 였던 남태량(南泰良)이 상신 정우량(鄭羽良) 형제의 추천으로 일약 재상에 승진된 사실을 지적하여 상소했다가 정우량 형제에게 밀려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오직 시문에만 전념했다. 저서로는 '모헌집' 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