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 대제학 재순(載純)의 아들이다. 예조판서 재소(載紹)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부터 형 윤상(允常)에게 수학, 학문의 방법은 자수자득(自修自得)을 주로 하여 성리학의 오의(奧義)에 정통하였다. 1800년(정조 24)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가 되고, 장릉참봉(長陵參奉), 돈령부참봉, 한성부주부, 황해도도사, 사어(司禦) 등을 지낸 뒤, 1818년(순조 18) 경연관, 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광주(廣州)의 징악산(徵嶽山)에 은거하였다.이 동안 지평, 장령, 집의, 승지 및 이조, 형조, 공조의 참의, 1829년 세손부(世孫傅), 1832년 찬선(贊善)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양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절충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주리(主理), 주기(主氣)의 양설에 대해서는 주리설을 옹호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독서수기 讀書隨記', '노주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