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붕로(鵬路). 호는 활산(活山). 조부는 우암(寓菴) 남구명(南九明)이고, 아버지는 남구선(南國先), 생부는 통덕랑(通德郞) 남국형(南國衡)이다. 어머니는 이덕함(李德咸)의 딸이다. 1756년(영조 32) 병자식년사마시(丙子式年司馬試)에 생원(生員) 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보지 않고 성현(聖賢)의 학문에만 전심하여 '대학장구난의(大學章句難疑)'를 저술했다. 1778년(정조 2)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고, 뒤에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겨 춘추가절(春秋佳節)에 경주의 자옥산(紫玉山), 반월성(半月城)에 잔치를 베풀고 돌아갈 것도 잊었다고 한다. 그리고 활산(活山)의 남쪽 덕계(德溪) 위에 집을 짓고 후생을 육성하였다. 항상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문에 전심하였는데, 1781년(정조 5) 겨울에 재이(災異)로 구언(求言)이 있자 치치(致治)의 도(道)와 구폐지책(救弊之策)에 대하여 만여언(萬餘言)의 상소를 올렸으나 방백(方伯)이 막고 올리지 않았다. 문집으로 '활산선생문집(活山先生文集)'이 있는데, 그의 아들 남경채(南景采), 남경희(南景羲) 등이 편집하여 1793년(정조 17)에 간행하였으며, 1826년(순조 26)에 손자 남봉양(南鳳陽) 등이 중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