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봉여(鳳汝). 효종의 부마였던 익현(益顯)의 현손, 현령 일진(一鎭)의 아들이며, 익운(翼雲)의 형이다. 본래 청평위의 후손으로서 명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나, 그의 아버지가 박상검(朴尙儉)의 사건에 연루되었던 역적 심익창(沈益昌)의 손자인 사순(師淳)의 양자로 입적되어 벼슬길이 평탄하지 못하였다. 동생 익운이 과거에 급제하고서도 역적의 후손이라 하여 관직에 오르지 못하자, 1762년(영조 38) 일진이 익운과 함께 사순의 양자로 입적된 사실을 인멸하려다가 물의를 일으킴으로써 일가가 모두 인륜을 어지럽히는 무리로 지목되어 사류의 배척을 받았다. 그뒤 1764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에 의하여 오명이 벗겨짐으로써 비로소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1771년 감시(柑試)에 급제하여 전시(殿試)에 직부(直赴)하였으며, 이듬해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774년 승지로 임명되었다. 이때 정후겸(鄭厚謙), 홍인한(洪麟漢) 등이 세손(世孫: 뒤에 正祖)의 대리청정을 막으려다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들의 사주를 받고 부사직으로서 세손의 사부(師傅)와 빈료(賓僚)를 비난하면서, 세손을 '온실수(溫室樹)'에 비유하는 흉서를 올렸다. 이에 세손이 마침내 사위(辭位)하려는 뜻을 밝히기에 이르자 삼사가 나서서 흉서를 올린 사실을 들어 탄핵하게 되었다. 대직(臺職: 사헌부의 벼슬)도 아닌 군직(軍職)에 있으면서 당명(黨名)을 늘어놓아 세손을 해하려 하였다는 탄핵과 함께 영조 로부터 가면을 쓴 '박상검'이라 지목되어, 동생 익운과 함께 서인(庶人)으로 폐출됨과 동시에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제주도로 이배되었다. 그뒤 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삼사의 상소로 인해 중앙으로 붙들려와 정조의 친국을 받은 뒤 주살되었고, 이때 홍인한 부자와 정후겸 등도 사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