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원성왕 때의 정치가. 태종무열왕의 7대손으로, 이찬 주원(周元)의 아들이며, 헌창(憲昌)의 형이다. 아들은 정여(貞茹)와 장(璋)이 있고, 손자로는 양(陽)과 흔(昕)이 있다. 관등은 소판(蘇判: 신라 제3관등의 별칭)으로서 집사부의 시중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주원은 신라 하대사회의 권력구조에서 태종무열왕 계를 대표하는 중심적 인물로, 선덕왕이 죽은 뒤 화백회의에 의해 왕위에 추대되었으나, 상대등 김경신(金敬信) 과의 왕위계승 경쟁에서 패배하였고, 그뒤 원성왕으로 즉위한 김경신에 의해 지금의 강릉 지방으로 축출되었다. 그러나 원성왕은 태종무열왕 계에 대한 정치적 무마책으로 김주원의 두 아들 종기와 헌창을 각각 집사부 시중에 임명하였으며, 종기는 790년(원성왕 6) 1월에 행정책임자로서 시중에 임명되었으나, 천재지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그해 10월에 시중 직을 사임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시중에 임명된 사람은 원성왕의 직계손이며, 이미 죽은 인겸(仁謙)의 맏아들인 준옹(俊邕) 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여기에는 원성왕이 자기의 직계자손에 의한 왕권강화책을 도모하기 위해, 그에게 정치적 책임을 지워 권력의 핵심에서 배제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원성왕에 의해 밀려난 김주원 계도 원성왕이 죽은 뒤 그의 두 아들인 인겸과 예영(禮英) 양파의 정치적 갈등을 이용하여 중앙정계에 다시 진출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로써 그의 아들 정여와 장도 시중을 역임하였고, 장손인 양도 시중과 병부령(兵部令)을 각각 역임함으로써 신라하대의 정치변동에 있어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