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윤시동(尹蓍東)
  • 해평윤씨(海平尹氏),  출생~사망 : 1729 ~ 179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백상(伯常). 호는 방한(方閒). 감사 세유(世綏)의 증손이며, 득민(得民)의 아들로, 어머니는 조정빈(趙鼎彬)의 딸이다. 1754년(영조 30) 25세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설서가 되었고, 정언,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56년 당론을 일으켰다고 탄핵을 받아 7년간 전리(田里)에 방귀(放歸)되었다가 풀려났고, 그뒤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기민구제에 공헌하였다. 1766년 대사간이 되자 신광집(申光緝)의 무죄를 논하다가 다시 전리에 방축되었고, 1772년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3년 후에는 대사헌이 되었다. 그뒤 대사성,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년) 경기도관찰사로 재직시 당론을 운위하다가 다시 남해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그뒤 개성유수로 발탁되었고, 형조판서로 있을 때 당론을 다시 운위하다가 삼화로 유배되었고, 이듬해인 1787년(정조 11) 풀려나서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김종수(金鍾秀), 심환지(沈煥之) 등 시파와 함께 벽파공격에 앞장섰고, 김한구(金漢耉), 홍인한(洪麟漢) 등 척신의 축재를 규탄하였다. 1795년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나라의 고사(故事)를 잘 알았고 군국(軍國)의 기무(機務)에 정통하였으며, 개성이 뚜렷하여 옳다고 생각하던 당론을 일삼았기 때문에 파란많은 생애을 보냈다. 편저로는 '향례합편 鄕禮合編'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