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미중(美仲). 아버지는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만조(萬朝)이며, 어머니는 증참의(贈參議) 권진(權○)의 딸이다. 1689년(숙종 15) 생진시에 합격하였고, 16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분관(分館)되었다가, 1702년부터 설서로 수년간 재임하였다. 1705년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거쳐 정언이 된 뒤, 잠시 함경도 고시관(考試官)으로 나갔다가 돌아와 다시 정언이 되었다. 이듬해 지평으로 전보되었고,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으며, 영남경차관(嶺南敬差官)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1707년 부수찬을 거쳐 수찬에 재임중, 비가 많이 와서 선릉(先陵)이 붕퇴(崩頹)되는 변이 있어, 조정에서는 음양가(陰陽家)만을 보내어 수리하려 하자 그는 국왕이 친행(親行)하여 능침을 개수할 것을 주장하는 소를 올려 조정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켰다. 1708년 함경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간리(奸吏)를 다스리고 민정을 살피는 한편 군사시설을 점검하여 그 문제점을 상계(上啓)하기도 하였다. 다시 경직으로 돌아와 수찬, 헌납 등을 역임한 뒤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보덕을 거쳐 1714년에는 사학(四學)가운데 하나인 중학교수(中學敎授)가 되었고, 다시 사간, 정언에 임명되었다. 그뒤 동학교수(東學敎授), 수찬을 지냈다. 어려서부터 검소한 생활을 몸에 익혀 평생을 근검하게 살았으며, 형제들 모두가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러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