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태화(李泰和)
  • 경주이씨(慶州李氏),  출생~사망 : 1694 ~ 1767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동장(東章). 호는 단암(丹庵). 몽엽(夢曄)의 아들로서 생원 몽려(夢呂)에게 입양되었다. 장인은 홍만기(洪萬紀)와 윤학해(尹學海)이다. 1711년(숙종 37) 통덕랑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뒤 전적으로서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으며, 1725년(영조 1) 옥구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이술(李述)의 부인을 노예로 삼고 횡포한 짓을 저지르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귀양갔다. 그뒤 1727년 풀려난 이후 30여년간을 고향에서 지내면서 글을 벗하고 살았는데, 1758년 다시 기용되어 사헌부장령이 되었고, 1760년 승지로 있으면서 67세의 많은 나이로 가자(加資)되었다. 1765년 영수각(靈壽閣)에서 기신(耆臣)의 위치로 크게 예우를 받았으며, 그가 죽은 뒤 1771년 영조는 18세라는 어린 나이로 과거에 급제한 그의 재질을 크게 칭찬한 뒤, 여기에 있는 많은 사람 가운데 18세 때 문과에 급제한 자가 누가 있느냐고 말하면서 그의 자손들을 녹용(錄用)하도록 지시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영민(榮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