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홍경보(洪景輔)
  • 풍산홍씨(豊山洪氏),  출생~사망 : 1692 ~ 1745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대이(大而). 호는 창애(蒼厓). 중하(重夏)의 아들이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727년(영조 3) 정언이 되어 형률시행(刑律施行)의 잘못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728년 부수찬을 거쳐, 대사간이 되어 숙종에게 수덕(修德)과 정요(政要)에 관한 6개조의 소를 올렸다. 1729년 탕평(蕩平)의 폐단을 소진하였다가 온성부사로 좌천되었으며, 1732년 우승지가 되었다.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우부승지가 되어, 인재등용에 있어 먼저 역사(逆詐)의 인격을 의심하고 당적(黨籍)에 따라 안배하는 탕평책의 폐단을 다시 상소하였다. 박문수(朴文秀)에 의하여 품행이 추장(推奬)되었고, 승지로서 사대부들의 방납폐해(防納弊害)에 대하여 소대(召對)에서 숙종에게 아뢰었다. 1734년 정월 김약로(金若魯)에 의하여 소척을 받았고, 7월에는 동지부사(冬至副使)가 되어 11월 4일 정사 윤유(尹游), 서장관 남태온(南泰溫)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같은해 춘당대(春塘臺)에서의 검사친시(劒士親試)의 불체(不體)를 간청하였으며, 1736년 3월 도승지가 되었고 5월 시법시행(諡法施行)에 있어 불성(不誠)을 들어 상소하였고, 같은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 대사헌으로서 당색 안배만 고려한 채 진정한 인재등용을 못하는 것과 당시 대신들의 무능을 비난하고 강렬하게 상소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관작착출에 대한 조정의 논의가 있었으나 다시 서용하겠다는 영조의 의견에 따라 공조참판,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이어 형조참판이 되었다. 1740년 한성부우윤이 되고, 1741년 지의금부사, 대사헌, 경기감사를 역임한 뒤 1743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