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국필(國弼). 호는 시은(市隱). 종실(宗室) 봉래수(蓬萊守) 형윤(炯胤)의 손자이고, 무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공조판서 최내길(崔來吉)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는데, 1694년 성균관 유생을 이끌고 송시열(宋時烈)의 신원(伸寃)을 위한 상소를 올리자 왕이 이를 가납(嘉納)하였다. 2년 뒤 문음(門蔭)으로 참봉에 기용되었고, 이어서 부평, 영동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1713년 60세의 나이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지평, 정언, 장령, 헌납, 집의 등의 대간직을 번갈아 역임하다가 1717년 좌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승지, 대사간을 역임하고 강원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다시 대사간, 승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1725년(영조 1)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후 동지의금부사, 대사간, 예조참판, 승지, 병조참판 등을 역임하였고, 1733년 80세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랐으며, 계속 가자되어 1736년 지돈령부사, 공조판서 등에 발탁되기도 하였다. 시호는 간헌(簡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