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공후(公厚). 호는 강우(江右). 아버지는 김방행(金方行)이며, 우의정 김이교(金履喬)의 동생이다.
1789년(정조 13)에 진사가 되고, 1790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고, 검열(檢閱), 지평을 거쳐, 1799년에 수찬으로 있을 때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죄인이던 정처(鄭妻)의 석방명령을 거두어줄 것을 네번이나 상계(上啓)하였고, 이듬해 이조판서 이만수(李○秀)의 사직상소가 마땅치 못하다고 논한 소를 올려 언양현(彦陽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고금도(古今島)에 안치되었다. 1805년에 풀려나와 대사간, 이조참의, 경상도관찰사, 대사성,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풍덕부(豊德府)를 개성에 통합시켜 지계(地界)를 확장, 정비하고 '중경지 中京誌'를 편찬하였다. 이어 행호군, 대사헌, 공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좌참찬, 예조판서, 이조판서 까지 이른 뒤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그뒤에도 계속 좌부빈객(左副賓客),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1839년(헌종 5)에 시파와 벽파간의 논쟁으로 기연(畿沿) 지방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다시 상호군, 공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당시 시파로 역량이 있는 중신이었으나, 시파와 벽파간의 파쟁으로 벼슬길이 평탄하지 못하였으며, 판서로 있을 때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전에 실린 금고조(禁錮條)를 산개(○改), 이혁(釐革)하여 백성의 신원안(伸寃案)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하여 노력한 일도 있다. 편서로는 '중경지'가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789년(정조 13)에 진사가 되고, 1790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고, 검열(檢閱), 지평을 거쳐, 1799년에 수찬으로 있을 때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죄인이던 정처(鄭妻)의 석방명령을 거두어줄 것을 네번이나 상계(上啓)하였고, 이듬해 이조판서 이만수(李○秀)의 사직상소가 마땅치 못하다고 논한 소를 올려 언양현(彦陽縣)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고금도(古今島)에 안치되었다. 1805년에 풀려나와 대사간, 이조참의, 경상도관찰사, 대사성,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풍덕부(豊德府)를 개성에 통합시켜 지계(地界)를 확장, 정비하고 '중경지 中京誌'를 편찬하였다. 이어 행호군, 대사헌, 공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판윤, 좌참찬, 예조판서, 이조판서 까지 이른 뒤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그뒤에도 계속 좌부빈객(左副賓客), 대사헌,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1839년(헌종 5)에 시파와 벽파간의 논쟁으로 기연(畿沿) 지방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다시 상호군, 공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당시 시파로 역량이 있는 중신이었으나, 시파와 벽파간의 파쟁으로 벼슬길이 평탄하지 못하였으며, 판서로 있을 때 '경국대전'을 비롯한 법전에 실린 금고조(禁錮條)를 산개(○改), 이혁(釐革)하여 백성의 신원안(伸寃案)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기 위하여 노력한 일도 있다. 편서로는 '중경지'가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