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계이(啓以). 예조참판 경헌(景憲)의 손자이고, 대사간 합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호조판서 성휘(聖徽)의 딸이다. 1662년(현종 3) 진사가 되고, 1687년(숙종 13)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사평(司評), 호조좌랑을 거쳐 여러 주군(州郡)을 다스리고, 1694년에는 수원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좌승지, 한성부우윤을 거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해는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어 도내 각 지역에서 아사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그는 기민(飢民)을 구제하기 위하여 병영의 창고에 비축된 곡식을 풀어 나누어주는 한편, 당시 함경도에서 많이 생산되던 생선과 소금을 남쪽지역에 보내어 곡식과 쌀로 바꾸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배급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사(京司)에 공납하여야 할 곡식마저 구제용으로 쓰는 등 많은 인정을 베풀었다. 이러한 공으로 그가 관찰사직에서 떠날 때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그뒤 병조, 형조의 참판과 한성부판윤을 거쳐, 1700년 동지사의 정사로 임명되어 연경(燕京)에 갔다가 사신들의 숙소였던 옥하관(玉河館)에서 죽었다. 이듬해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의 별사(別祠), 경성의 광혜사(光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