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준(景俊). 호는 한창(漢蒼). 동돈령(同敦寧) 송영로(宋永老)의 아들로 지금의 대전 동구 송촌동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서(漢書)를 즐겨 가학(家學)으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867년(고종 10)에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고, 1875년(고종 12)에는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에 임명되어 동궁(東宮)에서 필법(筆法)을 가르쳤다. 그 후 1876년(고종 13) 선공감역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는데, 그 이듬해에 의영주부(義盈注簿)에 올랐다. 또 그 이듬해에는 감찰(監察)을 제수받고 이어 예릉령좌익찬(睿陵令左翼贊)에 임명되었다. 1878년(고종 15) 의빈도사(儀賓都事)를 역임하였고, 훈도좌사(勳都左司)로 자리를 옮기었다. 또 공릉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기도 하였는데 얼마 후에는 다시 외직으로 고령현감(高靈縣監)에 나갔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81년(고종 18) 정월에 사퇴하였는데, 다시 바로 장악주부(掌樂注簿)에 임명되어, 선공감주부(繕工監注簿), 영희전령(永禧殿令), 종묘령(宗廟令),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 등을 거쳤다. 1888년(고종 25)에는 무자별시문과(戊子別試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곧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우부대사간(右副大司諫)을 하다가 1889년(고종 26)에는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891년(고종 28) 9월, 이조참의(吏曹參議)가 되었다가 다음 해인 1892년 6월에는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고, 12월에는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904년(광무 8) 6월 향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는 대전시 동구 송촌동에 있다. 저서로는 '한창유고(漢蒼遺稿)'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