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운(景雲). 해(瀣)의 손자로, 인경(麟經)의 아들이다. 1756년(영조 3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2년 후 잇단 양친상을 당하였고, 1761년 효행으로 소시(召試)되었으나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이때 특별히 가사(假史)에 임명되어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국조방목'의 1756년 식년시의 본과 급제자 명단에 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소급하여 급제를 하사받은 것으로 판단된다. 1766년 홍문관부정자를 시작으로 저작, 박사를 거쳐 예조좌랑에 임명되었고, 1771년에는 병조낭관으로서 국왕의 호위를 맡아 세번씩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다음해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언론으로 인한 대사간의 파직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부당하다고 간쟁하다 파직되어 그날로 고향인 상주로 귀향하여 작은 독서실인 만락재(○樂齋)를 짓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으며, 14년 뒤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790년 신하로서 70세에 이른 경우 모두 통정대부를 내렸을 때 특별히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관직의 박하고 후함을 가리지 않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을 신조로 관직생활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