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실(景實). 호는 혁림(赫臨). 할아버지는 승지 김구만(金龜萬)이다. 아버지는 김남식(金南栻)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 지평(持平) 윤이후(尹爾厚)의 딸이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참봉(參奉) 이현극(李玄亮)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출중하여 남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교에 임명되었다. 그뒤 병조정랑과 용강현령을 지냈는데, 이때 훌륭한 이름을 남겼다. 1765년(영조 41) 공조참의에 오르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돌아와서 후진들의 교육과 경전을 외며 자기수양에 진력했다. 죽은 뒤 1796년(정조 20) 호군 채홍(蔡弘)의 천거로 청백리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출중하여 남의 칭찬을 많이 받았다.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교에 임명되었다. 그뒤 병조정랑과 용강현령을 지냈는데, 이때 훌륭한 이름을 남겼다. 1765년(영조 41) 공조참의에 오르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향리에 돌아와서 후진들의 교육과 경전을 외며 자기수양에 진력했다. 죽은 뒤 1796년(정조 20) 호군 채홍(蔡弘)의 천거로 청백리에 올랐다.
정조43년 정해(丁亥) 7월 20일 74세로 졸하였고, 묘는 당진 장항 묘좌(卯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