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경모(景模). 호는 호산(壺山), 풍산(楓山), 노초(老樵). 한담공(閑潭公) 박기성(朴基成)의 아들로 7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고 11세 때에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의 학통을 계승한 어당(○堂) 이상수(李象秀)를 처음 만난 뒤 20세부터 어당에게 수학하였다.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자 의리심성지학(義理心性之學)에 전념했다. 1877년(고종 14)에는 신윤일(申允一)의 백원정사(白園精舍)에서 강학하였으며, 그 해 나라에서 인재를 구할 때 학행으로 추천받았다. 1885년(고종 22)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관해 논의하였고,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관한 서신을 주고받았다. '대학장구상설(大學章句詳說)', '논어집주상설(論語集註詳說)', '맹자집주상설(孟子集註詳說)', '시집전상설(詩集傳詳說)', '서집전상설(書集傳詳說)', '주역본의상설(周易本義詳說)', '풍산기문록(楓山記聞錄)', '중동고금인가희유록(中東古今人家希有錄)', '여소학(女小學)', '호산집(壺山集)', '인물성고(人物性考)' 등 백여 권을 저술하였다. 1872년 보은군 화북면에 풍림정사(楓林精舍)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였고, 주희(朱熹),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한원진을 봉안하여 제향을 올렸다. 박문호의 영정은 1921년에 추가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