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김춘택(金春澤)의 사위이다.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 때 소론은 연령군(延齡君: 뒤의 경종)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노론은 경종의 아우인 연잉군(延○君: 뒤의 영조)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때 숙종은 노론의 거두 좌상 이이명(李○命)을 소대(召對)하여 세자에게 왕위를 맡길 수 없다고 말하다가 이이명이 이를 만류하자 두 왕자의 장래를 이이명에게 부탁하였고, 이이명은 김용택(金龍澤)과 이천기 양인을 추천하여 숙종의 뜻을 그들에게 전하였다. 이천기 등은 이이명의 부탁을 받고 그의 자질(子姪)인 희지(喜之), 기지(器之)와 김창집(金昌集)의 손자 성행(省行) 등과 모의하여 무사와 술객을 비밀리에 길러 비상사태에 대비하였다. 경종이 왕위에 오른 그해 8월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李健命), 민진원(閔鎭遠)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이 중심이 되고, 이천기, 김용택, 심상길(沈尙吉), 서덕수(徐德修), 정인중(鄭麟重) 등 5인과 더불어 연잉군을 왕세제로 세우자는 주장을 하고 이를 강행하려다 실패하여 역률(逆律)로 함께 처형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 대사성 송인명(宋寅明)이 어전에서 이천기 등은 숙종 말년부터 은으로 뇌물을 써서 내시, 궁녀들과 결탁한 형적(形跡)이 현저하므로 처벌은 당연하다고 주청하였으나, 영조는 임인옥안(壬寅獄案)을 불태우고 친히 '대훈(大訓)'이라는 글을 지어 종묘에 고한 뒤 노론 4대신에게는 시호를 다시 주고, 이천기 등 5인에게도 벼슬을 다시 주려 하였으나 박문수(朴文秀), 이종성(李宗城) 등의 반대가 있자, 왕은 '대훈'의 글자를 수정하면서까지 모두 신원설치(伸寃雪恥)하게 하였다. 즉, 노론 4대신의 연차(聯箚)나 이천기 등 5인의 음모가 모두 영조를 위한 것이니 이것이 곧 나라를 위한다는 단안이었다. 식견이 높고 가벼운 의리라도 태산같이 여겼으며, 성품이 곧고 강직하여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