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자는 후이(厚而). 호는 임은(林隱). 아버지는 헌기(軒紀)이며, 어머니는 능성구씨(綾城具氏)로 환(奐)의 딸이다. 1718년 박필주(朴弼周)에게 사사하였고, 그뒤 김한간(金翰○), 이재(李縡)의 문하에도 출입하였으며, '오자근사록변 五子近思錄辨' 등을 저술하여 학계의 중망(重望)을 받았다. 1727년(영조 3)사마시에 합격하고, 17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승정원의 주서가 되었다. 이어 사헌부의 지평이 되어 경연(經筵)에 나가 의리를 밝히고 언로를 개척하게 하였다. 그뒤 시임(時任)정승을 탄핵하다가 삭직되었다. 1746년 다시 보령현감이 되어서는 '황극연의 皇極衍義'를 지어 왕에게 바쳐서 왕도정치를 촉구하였다. 1755년 사간이 되었을 때 이천보(李天輔)를 탄핵하다가 귀양가는 조종보(趙宗輔)를 신원하는 상소를 올려, 언로를 막는 것은 망국의 근본이라 직간하다가 거제로 귀양갔다. 그해 다시 풀려나 시강원의 보덕으로 승진되었고, 다시 사헌부의 집의와 사간에 임명되었다. 이때 강도유수(江都留守)의 독직사건이 있어 이를 논핵하다가 육진(六鎭)으로 귀양가던 도중 금성(金城) 창도역(昌道驛)의 숙소가 불탈 때 타죽었다. 왕이이 소식을 듣고 귀양을 풀고 관직을 회복, 도승지에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임은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