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최동량(崔東亮)
  • 경주최씨(慶州崔氏),  출생~사망 : 1598 ~ 1664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자는 자명(子明). 호는 송정(松亭). 월성 출신. 아버지는 병조판서에 증직된 최진립(崔震立)이며, 어머니는 유윤렴(柳允濂)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가던 도중 아버지가 용인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반구(返柩)하였다. 1641년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그뒤 경사(京司)의 봉사(奉事), 별좌(別坐) 등을 역임하였다.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침략하여 연경(燕京)으로 천도하고 순치(順治)의 연호를 반포하자, 이에 분격하여 언양현의 오연산(烏淵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1646년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649년 지평현령(砥平縣令)에 배수되었으나 체직(遞職)을 상소하였다. 1652년(효종 3) 개령현감(開寧縣監)에 취임하였고, 1656년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에 배수되었다가 곧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구폐를 혁신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병자호란 이후 집안의 노비들에게 농사 기술을 적극 보급하는 한편 경주 내남면 이조리 일대의 토지들을 개간하고 형산강의 물줄기를 끌어들여 수로시설을 건설해 이양법을 도입한 결과 큰 부를 쌓게 되었다.

최동량의 장남 최국선(崔國璿)은 소위 명화적(明火賊)이라 불리는 도적떼의 침입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교훈삼은 최국선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마음가짐으로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먹여살렸고, 이는 '경주 최부잣집'의 명성으로 이어진다.

이후 집안은 독립운동가이자 기업가로 백산상회를 운영하며 독립자금을 대었던 문파(汶坡) 최준(崔浚)까지 400년 12대를 만석꾼으로 불리었다.

저서로는 '송정유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