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자는 익재(益哉). 호는 치암(癡巖). 나주목사 응경(應○)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옥천전씨(沃川全氏)로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해(海)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조수익(趙壽益), 이식(李植)과 교유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이듬해에 시작된 폐모론의 소(疏)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로 유적(儒籍)을 삭탈당하였다. 그뒤 고향인 영주에 돌아가 지내다 1624년 인조반정 후 다시 문과에 급제, 1625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보임되었다. 이어 사섬시(司贍寺), 내자시(內資寺) 등에 재임한 후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가좌사(假左史)로서 인조의 피난을 호종(扈從)하였다. 얼마 후 사간원정언 김설(金卨)의 무고(誣告)로 파직당하였으며, 그뒤 1628년 성균관전적,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이듬해 형조, 병조의 원외랑(員外郞), 1630년 전라도와 황해도의 아사(亞使)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1631년 진주판관에 제수되어 부임하는 길에 여주에서 객사하였다. 천곡(泉谷)의 봉계서원(鳳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치암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