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 호조참판 비경(飛卿)의 손자로, 명운(明運)의 아들이며, 우참찬 봉오(鳳五)의 형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1714년(숙종 40) 진사가 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 1) 청도군수가 되었다. 1733년 사헌부지평, 이듬해 장령이 되었고, 1739년 집의에 이르렀다. 1741년 부호군이 되었는데 이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宋時烈)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당하였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이 되었다. 1743년 사과, 1749년 진선, 1754년 서연관(書筵官), 이듬해 찬선을 차례로 역임하고, 1760년 대사헌에 특제(特除)되었으며, 1763년 지돈령(知敦寧)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한원진(韓元震), 이간(李柬), 현상벽(玄尙璧), 채지홍(蔡之洪) 등과 더불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불리며, 인성(人性), 물성(物性)에 대한 이동(異同)을 논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인물로 꼽힌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들 중 이간과 한원진 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하는데, 인성과 물성이 서로 같다는 이간의 학설은 뒤에 이재(李縡)와 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와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윤봉구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한 것이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사회적, 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 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하였으며, 저술내용면에서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저서로 '병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