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 아버지는 참봉 김이수(金履鏽), 어머니는 죽산안씨(竹山安氏) 안종주(安宗周)의 딸이다.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사인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그뒤 예조참판을 거쳐 1821년(순조 21) 강화부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당대의 문장가로 홍석주(洪奭周) 등과 함께 명성이 높았으며,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또한, 성리설에 관하여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에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고종 때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대산집',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주자대전차문표보(朱子大全箚問標補)', '전여일록(篆餘日錄)',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등이 있다.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사인을 거쳐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고, 그뒤 예조참판을 거쳐 1821년(순조 21) 강화부유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당대의 문장가로 홍석주(洪奭周) 등과 함께 명성이 높았으며, 여한십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또한, 성리설에 관하여 일가견을 가지고 있어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에 한원진(韓元震)의 호론(湖論)을 지지하였다. 고종 때 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대산집', '대산공이점록(臺山公移占錄)', '주자대전차문표보(朱子大全箚問標補)', '전여일록(篆餘日錄)',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