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자는 공가(公可). 호는 무위자(无爲子).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무예를 익혔으나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였고, 허목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고 인정을 받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분의(奮義)하여 서울로 올라갔으나, 화의의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숙종이 즉위하여 현종릉지문(顯宗陵誌文)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짓게 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1675년(숙종 1) 사옹원봉사(司甕院奉事)에 특임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그뒤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가 되었다. 윤휴(尹○)의 천거로 형조좌랑에 이어 공조정랑을 지냈으며, 1676년에 봉직랑(奉直郞)으로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익산군수로 나아가 치적을 올렸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허적(許積), 윤휴 등이 사사되자, 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온 지 2년 만에 죽었다. 저서로는 '무위당유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