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자는 경온(景蘊). 호는 용연(容淵). 아버지는 김남응(金南應)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로 김주억(金胄嶷)의 딸이다. 부인은 숙인(淑人) 여주이씨(驪州李氏) 이헌주(李憲周)의 딸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779년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그뒤 장릉별검(莊陵別檢), 종부시주부,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798년 장령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형인 종덕(宗德), 종경(宗敬), 종섭(宗燮)을 비롯하여 동문인 유장원(柳將源), 이지춘(李遲春), 황학중(黃學中) 등과 더불어 사설(師說)의 계승, 발전에 노력하였다. 학문적으로는 특히 '대학', '중용'을 비롯하여 주자서와 '심경' 등에 심취하여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경세의 도를 연구하기에 힘썼다. 저서로는 '용연일고' 2책이 있다.
순조12 임신(壬申)년 7월 23일 졸하였고, 묘(墓)는 의성군 점곡면 송내동 장각동 계좌(癸坐)이다.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1779년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그뒤 장릉별검(莊陵別檢), 종부시주부,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798년 장령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형인 종덕(宗德), 종경(宗敬), 종섭(宗燮)을 비롯하여 동문인 유장원(柳將源), 이지춘(李遲春), 황학중(黃學中) 등과 더불어 사설(師說)의 계승, 발전에 노력하였다. 학문적으로는 특히 '대학', '중용'을 비롯하여 주자서와 '심경' 등에 심취하여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경세의 도를 연구하기에 힘썼다. 저서로는 '용연일고' 2책이 있다.
순조12 임신(壬申)년 7월 23일 졸하였고, 묘(墓)는 의성군 점곡면 송내동 장각동 계좌(癸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