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시조작가. 아버지는 군수 단화(端和)이며, 어머니는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응선(應善)의 딸이다. 1851년(철종 2) 풍계군(豊溪君) 당(塘)의 후사(後嗣)가 되어 이름을 호(晧)로 개명하고 소의대부(昭義大夫) 종2품 경평군(慶平君)의 작호를 받았다. 이어 중의대부 겸 오위도총부(中義大夫兼五衛都摠府)부총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승헌대부(承憲大夫), 숭헌대부(崇憲大夫)가 되었다. 1852년에 의덕대부(宜德大夫), 1853년에 정1품인 현록대부(顯祿大夫)가 되어 철종의 수라상을 감선(監膳)하는 직책을 맡았다. 1857년에 동지사은정사(冬至謝恩正使)가 되어 부사 인 호조참판 임백수(任百秀)와 서장관 인 시복정 김창수(金昌秀)를 대동하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1860년에 외척세도가의 미움을 받아 강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가 1863년(고종 즉위년)에 조대비(趙大妃)와 흥선대원군의 배려로 석방되었다. 1865년에 부총관으로 벼슬을 다시 시작하여 한성부우윤, 한성부좌윤, 1866년에 병조참판, 동지돈령부사, 형조참판, 공조참판을 지냈고, 1868년에 이름을 인응(寅應)으로 개명하였다. 1869년에는 호조참판, 이어 다시 부총관이 되었다. 그뒤 여주목사, 오위도총부,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판의금부사가 되어 1894년까지 고관대작으로서 다섯 차례의 공조판서, 여섯 차례의 판의금부사, 두 차례의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안동김씨 일파의 세도정치로 혼미했던 철종 시대에 종친으로서 이하응(李昰應)과 함께 가장 뚜렷한 인물이었다. 여주목사와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에는 언제나 백성편에 서서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펴주려고 애쓴 목민관 이었다. '풍아 風雅', '시가 詩歌' 등의 시조집이 있고, 458수의 시조를 지음으로써 조선시대에 있어서 가장 많은 시조를 지은 인물이다. 시조의 주제 내용은 부정부패비판, 유배, 애정, 도덕, 절후, 기행, 계고(稽古), 유람유흥(遊覽遊興) 등으로 다양한 것이 다른 작가의 시조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