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수증(金壽增)
  • 안동김씨(安東金氏),  출생~사망 : 1624 ~ 1701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극효(金克孝)의 증손으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광찬(金光燦)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연안김씨(延安金氏)로 청주목사(淸州牧使) 김내(金琜)의 딸이다. 부인은 창녕조씨(昌寧曹氏)이며, 참판(參判) 조한영(曹漢英)의 따님이다.

1650년(효종 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2년에는 세마(洗馬)가 되었다. 그뒤 형조정랑, 공조정랑을 거쳐 각사(各司)의 정(正)을 두루 역임하였다. 젊어서부터 산수를 좋아하여 금강산 등 여러 곳을 유람한 뒤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1670년(현종 11)에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영당동에 복거(卜居)할 땅을 마련하고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었다. 그뒤 1675년(숙종 1)에 성천부사로 있던 중, 동생 수항(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농수정사로 돌아갔다. 이때 주자(朱子)의 행적을 모방하여 그곳을 곡운(谷雲) 이라 하고, 곡운구곡(谷雲九曲)을 경영하면서 화가인 조세걸(曺世傑)을 시켜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하는 등 글씨와 그림에 관심을 기울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송시열과 동생 수항 등이 죽자, 벼슬을 그만두고 화음동(華蔭洞)에 들어가 정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옥사 후 다시 관직에 임명되어 한성부좌윤, 공조참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한 뒤 세상을 피해 화악산(華嶽山) 골짜기로 들어가 은둔하였다. 이때 그는 성리학에 심취하여 북송(北宋)의 성리학자들과 주자의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그 가운데에서 특히 소강절(邵康節)의 음양소식관(陰陽消息觀)을 정사의 조경(造景)에 응용하였다. 이와같은 사상을 도상화(圖象化)하는 데 힘을 기울여, 주돈이(周敦○)와 주자의 행적에 나타나는 '태극도', '하도낙서 河圖洛書', '선후천팔괘도 先後天八卦圖' 등을 정사의 경내에 있는 바위에 새겨 '인문석(人文石)'이라 하였다. 또한, 계곡에 있는 바위들에 천근석(天根石), 월굴암(月窟巖) 등 소강절의 사상시(思想詩)에 나오는 음양소식관을 담은 이름도 붙여 조경을 하였다. 이들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어 성리사상이 건축에 미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춘천의 춘수영당(春睡影堂)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곡운집'이 있다.

1701년(숙종27) 3월 4일 78세로 졸하였고, 묘(墓)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산6번지, 부인과 쌍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