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서예가.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竹南). 이조참판 백령(百齡)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주서를 거쳐 지평, 장령, 필선, 수찬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뒤인 1639년(인조 17) 한성부판윤으로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그뒤 1643년 청나라 세조의 즉위에 즈음하여 등극부사(登極副使)로, 1648년에는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년(효종 1)에 예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뒤 형조판서, 대사헌, 우빈객(右賓客) 등을 거쳐 1660년(현종 1) 좌참찬이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왕가의 길흉책문(吉凶○文)과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사(公私)의 비명을 썼다. 특히 그의 글씨는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따라 단아한 모양의 해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죽남당집'이 있으며, 글씨로 아산의 충무공이순신비(忠武公李舜臣碑), 구례의 화엄사벽암대사비(華嚴寺碧巖大師碑), 회양(淮陽)의 허백당명조대사비(虛白堂明照大師碑), 이판이현영묘비(吏判李顯英墓碑), 광주(光州)의 의창군광묘비(義昌君珖墓碑), 일본 닛코사(日光寺)의 닛코산조선등로명(日光山朝鮮燈爐銘), 안성(安城)의 대동균역만세불망비(大同均役萬世不忘碑), 죽산(竹山) 칠장사(七長寺)의 벽응대사비(碧應大師碑) 등의 비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