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서예가. 자는 사의(士猗). 호는 벽곡(碧谷). 아버지는 군수 김이유(金履裕)이다.
1804년(순조 4)에 진사가 되고, 1813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검열, 어사, 이조참의, 보덕, 홍문관부제학, 황해도감사, 이조참판, 호조참판, 형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대사헌, 우참찬 등을 거쳐 1841년(헌종 7)에는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뒤 우참찬, 형조판서, 판윤, 예조판서를 거쳐 1848년 판돈령으로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고, 수원부유수, 형조판서를 지냈다. 과거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으며, 안동김씨 인 이유로 일생을 통하여 관력이 순조로웠으나 뚜렷한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효현왕후(孝顯王后)의 지문(誌文), 존호옥책문(尊號玉冊文), 시책문(諡冊文), 제문, 행장 및 음기(陰記)를 짓고 썼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1804년(순조 4)에 진사가 되고, 1813년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검열, 어사, 이조참의, 보덕, 홍문관부제학, 황해도감사, 이조참판, 호조참판, 형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대사헌, 우참찬 등을 거쳐 1841년(헌종 7)에는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그뒤 우참찬, 형조판서, 판윤, 예조판서를 거쳐 1848년 판돈령으로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고, 수원부유수, 형조판서를 지냈다. 과거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으며, 안동김씨 인 이유로 일생을 통하여 관력이 순조로웠으나 뚜렷한 업적은 남기지 못했다.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효현왕후(孝顯王后)의 지문(誌文), 존호옥책문(尊號玉冊文), 시책문(諡冊文), 제문, 행장 및 음기(陰記)를 짓고 썼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