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 서예가. 자는 도장(道長). 호는 취몽헌(醉夢軒). 판서 두인(斗寅)의 아들이다. 12세인 1679년(숙종 5)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와 혼인하여 해창위(海昌尉)에 봉해졌고, 명덕대부(明德大夫)의 위계를 받았다. 그뒤 광덕대부(光德大夫)로 진계(進階)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조지서제조(造紙署提調), 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희빈장씨(禧嬪張氏) 소생 왕자를 세자로 책봉하려는 숙종과 남인에 대하여 노론의 송시열(宋時烈) 등이 반대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찬동하여 책봉을 반대하는 의견을 상계했다가 일시 관작이 삭탈되었으며, 얼마 뒤 왕명에 의하여 직첩이 환급되기도 하였다.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예서에 능하였는데, 1712년에는 청나라 사신이 국왕과 대신의 시가 담긴 병풍을 원하자 그것을 서사(書寫)하기도 하였고, 왕실의 옥책(玉○)과 신판(神板), 유지(幽誌) 등을 많이 썼다. 또한 시문에도 능하여 숙종의 많은 총애를 받았다. 전하는 묵적으로는 행서체로 쓴 간찰이 다소 있으며, 금석문으로는 오두인석비(吳斗寅石碑) 등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