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참판 충경(忠敬)의 아들이다. 1450년(세종 32)에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와 혼인한 뒤 영양위(寧陽尉)에 봉하여지고, 단종 초기에 형조판서가 되어 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455년(단종 3)에 금성대군(錦城大君) 유(瑜)의 사건에 관련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해에 수양대군이 즉위하였는데,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 하여 경기도 양근(楊根)에 양이(量移)되었으나, 1456년(세조 2) 사육신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다시 수원, 통진을 거쳐 광주(光州)에 안치되었다가, 1461년 승려 성탄(性坦) 등과 반역을 도모하였다 하여 능지처참되었다. 그와 함께 유배되어 관비(官婢)가 된 경혜공주가 적소에서 아들을 낳자,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친히 양육하고 세조가 미수(眉壽) 라 이름하였다. 영조 때 신원되었고, 단종묘와 공주 동학사(東鶴寺)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헌민(獻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