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박종우(朴從愚)
  • 운봉박씨(雲峰朴氏),  출생~사망 : ? ~ 1464
조선 초기의 문신. 찬성(贊成) 신(信)의 아들이다. 1419년(세종 1) 태종의 서녀(庶女) 정혜옹주(貞惠翁主)에게 장가가서 운성군(雲城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자헌대부에 승진되었다. 1423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26년에는 황주선위사(黃州宣慰使)로 나갔다가 이해에 사은 겸 진하사(謝恩兼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갔다. 1428년 선위사로 황주와 평양에 나갔으며, 1432년에도 선위사로서 황주와 함길도에 나갔다. 1436년 호조판서에 임명, 숭정대부에 승진되었으며, 이해에 외직으로 나가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1442년 삼군장수(三軍將帥)에 참가하고, 이해에 호조판서로서 선공감제조를 겸직하였으며, 이듬해 의금부제조와 전제상정소제조(田制詳定所提調)를 겸직하였다. 1444년 판호조사(判戶曹事)에 승진, 이해 부친상으로 사직하였으나 1445년 왕명으로 기복(起復)되어 판호조사, 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47년 이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임명되고, 1449년 함길도도체찰사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 제거하는 데에 가담, 협력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고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454년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어 군읍(郡邑)의 연혁을 심정(審定), 사군혁파(四郡革罷)를 건의하였다. 집이 대대로 부유하여 윤사로(尹師路), 윤사균(尹士○), 정인지(鄭麟趾)와 더불어 재물을 저축한 것이 서로 동등하였으므로 사부(四富)라 일컬어졌다. 시호는 성렬(成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