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형지(馨之). 호는 연헌(蓮軒). 아버지는 온양군사 추(抽)이며, 어머니는 예문관대제학 윤회(尹淮)의 딸이다. 1467년(세조 13) 사마시를 거쳐 1477년(성종 8)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박사,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을 역임하고, 1487년 성균관전적으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여 녹피(鹿皮)를 하사받았다. 이해 홍문관교리로 밀양에 파견되어 흥학(興學)에 관한 일을 조사, 보고하고, 이듬해 사헌부지평, 1492년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1493년 홍문관응교로서 형벌을 남용하여 임실현감 노처리(盧處利)를 치사(致死)하게 한 사건으로 파직되었다. 1495년(연산군 1) 사간원사간, 이듬해 사헌부집의, 상의원정을 역임하고,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어천역(魚川驛)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502년 성균관사성, 군기시정에 보직되었으나, 정치가 문란해짐을 보고 외직을 청하여 홍주목사로 나갔다가 기한내에 조세를 수납(輸納)하지 않아 한때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1507년(중종 2) 선정으로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기도(氣度)가 활달하고 시문에 능하였으며, 등조(登朝)한 지 30여년에 조금의 저축도 없어 가세가 늘 청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