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조위(曺偉)
  • 창녕조씨(昌寧曺氏),  출생~사망 : 1454 ~ 1503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태허(太虛). 호는 매계(梅溪). 울진현령 계문(繼門)의 아들이다. 7세에 이미 시를 지을 정도로 재주가 뛰어나 족숙 석문(錫文)이 불러 가숙에 머물러 독서하도록 하였다. 1472년(성종 3)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 예문관검열을 역임하고 성종 때 실시한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첫번으로 뽑혔다. 그뒤 홍문관의 정자, 저작, 박사, 수찬, 사헌부지평, 시강원문학, 홍문관교리, 응교 등을 차례로 거친 뒤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청하여 함양군수가 되었다. 그뒤 의정부검상, 사헌부장령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도승지에 이르고, 호조참판,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종직(金宗直)의 시고(詩稿)를 수찬한 장본인이라 하여 오랫동안 의주에 유배되었다가 순천으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죽었다. 김종직과 친교가 두터웠고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함양군수 때에는 조부(租賦)를 균등하게 하기 위하여 '함양지도지 咸陽地圖志'를 만든 것으로 전하는데, 이는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일선지도지 一善地圖志'를 만든 것과 같은 일이다. 또, 유향소(留鄕所)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향사례(鄕射禮), 향음주례(鄕○酒禮)를 실행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박식하고 문장이 위려(偉麗)하여 문하에 많은 문사가 배출되었다. 유배중에도 저술을 계속, '매계총화'를 정리하다가 죽었다. 작품으로는 '조계문묘비 曺繼門墓碑'가 있고, 저서로는 '매계집'이 있으며, 만분가(萬憤歌)라는 유배가사를 남겼다. 김산의 경렴사(景濂祠)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