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정의대부 판예빈시사 김근중(金斤重)의 현손으로 전농정(典農正) 김득우(金得雨)의 증손이며, 봉례랑(奉禮郞) 김혁(金革)의 손자이고, 비안현감(比安縣監) 김삼근(金三近)의 둘째 아들이다. 부인은 증정부인(贈貞夫人) 이천서씨(利川徐氏)와 증정부인(贈貞夫人) 의령남씨(宜寧南氏) 두분이다.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뒤 성주, 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고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山○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1517년(중종12) 정축(丁丑)년 12월 17일 87세에 졸하였고, 묘(墓)는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다.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뒤 성주, 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합격하고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山○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1517년(중종12) 정축(丁丑)년 12월 17일 87세에 졸하였고, 묘(墓)는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