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중경(仲耕). 파성군(坡城君) 금손(金孫)의 아들이다. 1513년(중종 8)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고, 이듬해 정자, 저작으로 출발하여, 그뒤 박사, 정언, 부수찬, 교리, 지평, 장령, 집의 등 삼사의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518년 사간 으로, 난해한 글로 알려진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진강(進講)할 수 있는 26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계(選啓)되었다. 이어 소격서(昭格署)의 혁파에 대하여 정계와 사림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사림을 모함하는 '시간계서 矢幹係書'에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등과 함께 그의 이름이 열거되기도 하였다. 또, 향약의 보급, 현량과(賢良科)실시, 위훈(僞勳)삭제 등 삼사를 중심으로 한 사림의 입장을 실천시키는 데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519년 의주목사, 직제학, 우부승지를 거쳐 좌승지로 있을 때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온양으로 중도부처되었다가 다시 북청으로 위리안치되었으며 배소에서 죽었다. 그는 '상서 尙書' 무일편(無逸篇)을 진강하는 등 학식이 뛰어났고, 무예도 겸비하였기 때문에 기묘사화를 일으켰던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등에 의하여 일차적인 제거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1538년(중종 33) 기묘사림이 다시 서용되면서 신원되어 직첩이 환급되었고, 1746년(영조 22)에 증직, 증시(贈諡)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