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여(子輿). 아버지는 금성현령(金城縣令) 수(壽)이며, 어머니는 의영고사(義盈庫使) 한가구(韓可久)의 딸이다. 효자로 이름이 높았다. 1480년(성종 11)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여동생이 후궁으로 선택되어 그 혜택으로 서부참봉(西部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한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491년 도원수 허종(許琮)에 의해 선전관으로 발탁된 이후, 사축(司畜)을 지내고, 사평(司評)이 되어 담당한 송사를 명쾌하게 처리했다. 그뒤 사옹원판관(司甕院判官), 경상도도사, 전라도도사, 사직서영(司稷署令), 한성부판관, 형조정랑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에 지평이 되었다. 그뒤 장령, 전첨(典籤), 사도시부정(司○寺副正)을 역임하고, 부모봉양을 위해 외직을 희망, 1506년 인천부사가 된 뒤 안변도호부사, 성주목사를 역임하면서 민폐일소에 힘썼다. 1507년 증광별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섬시정(司贍寺正),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공주목사로 나갔다. 성주목사로 있을 때 선산부사 유희철(柳希輟), 김산군수 문근(文瑾)과 더불어 '영남삼량(嶺南三良)'이라 하여 이름난 수령으로 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