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뉴(金紐)
  • 안동김씨(安東金氏),  출생~사망 : 1420 ~ ?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 취헌(翠軒), 쌍계재(雙溪齋), 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아버지는 김중엄(金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1464년(세조 10) 녹사로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황해, 평안도의 땅을 개간한 공으로 벼슬에 나가 성균학유가 되었다. 곧 사복직장으로 옮겼으며, 이듬해 호조좌랑으로 '경국대전' 편찬작업을 위해 이전(吏典)을 수교하였고, 또 경차관으로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1466년 발영시, 등준시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안효례(安孝禮), 유희익(兪希益) 등과 함께 도성(都城)을 측량하고 지도를 작성하였다. 또한, 예문관직제학으로 '세조실록', '예종실록' 등을 편찬하는 데 기여함이 컸다. 1470년(성종 1) 완성단계에 있는 '경국대전'을 다시 수교하였다. 1472년 동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참찬관으로 저화법(楮貨法) 사용을 강조하는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어 공조참판,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78년에는 대사헌으로 군비확충을 위해 전라도 순천 지방에 석보(石堡)를 쌓고 군인을 늘리며, 함경도 회령과 마도달량어란(馬글達梁於蘭)사이에 보를 설치하고 식량을 저축할 것을 제의하여 실천하게 하였다. 1479년 겸성균관동지사가 되고, 1481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1484년 행사직이 되고, 이듬해 시를 지어 바쳐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으며, 1490년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재주가 있고 학문을 좋아하여 글을 잘 지었고, 행서와 초서 등 글씨에 능하였으며, 거문고도 잘 하여 '3절(三絶)'이라 불리었고 그림 또한 잘 그렸다. 글씨로는 해동명적(海東名跡), 초로관주(草露貫珠) 등에 모간(模刊)한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