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익지(益之), 필보(弼甫). 우의정 사흔(士昕)의 아들이다. 1457년(세조 3) 음보로 세자우참군(世子右參軍)에 처음 제수되고, 그뒤 호조정랑을 거쳐, 1467년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으로 선전관(宣傳官)을 겸하였다. 같은해에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우부승지가 되고, 1468년(예종 즉위년) 좌부승지가 되었는데, 남이(南怡)의 옥사에 끼친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 그뒤 우승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70년(성종 1) 가정대부(嘉靖大夫)로 호조참판에 승진되었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였으며, 같은해 성종의 즉위를 도운 공으로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72년 공조참판으로 경기도관찰사를 겸하였고, 그뒤 이조참판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행형조참판(行刑曹參判),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47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연평군으로 개수되었다가 다시 형조판서를 거쳐, 1480년 행경상도관찰사, 공조판서가 되고, 1483년 정헌대부(正憲大夫)로 다시 영평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공양(恭襄, 또는 恭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