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조원기(趙元紀)
  • 한양조씨(漢陽趙氏),  출생~사망 : 1457 ~ 1533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이지(理之). 호는 돈후재(敦厚齋). 정랑 충손(衷孫)의 아들이며, 광조(光祖)의 숙부이다. 9세 때에 장기를 두고 놀이에만 치중하자 그의 어머니가 한탄하는 말을 듣고 반성한 뒤 학문에 정진하여 1483년(성종 14) 사마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정언,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사관(史官)으로 재직중 임금이 생존시에는 아무도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사초(史草)를 연산군이 보고자 제출을 명하였으나 이에 불응하여 파직되었고, 곧 복직되어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이 되었다. 그러나 1504년에 전자의 사초관계로 다시 횡성으로 유배되었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사성이 되었다. 그는 목민(牧民)하는 데 자상하고 무관의 일도 잘 아는 까닭에 경원부사로 나갔는데, 그곳에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그 공으로 대사간에 승진되었고, 이어 좌부승지로 재직중 청백리에 녹선되고 이어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515년(중종 10)에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이듬해 대사헌, 이조참판을 역임하고, 형조판서를 거쳐 좌참찬을 지냈다. 1523년 명나라 황태후가 상을 당하매 진위사(陳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1526년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그의 조카 광조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 그는 심히 근심하며 편지를 보내어 경계하였다. 저서로는 '조문절공유고 趙文節公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