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이경동(李瓊仝)
  • 전주이씨(全州李氏)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옥여(玉汝). 고려 조의 정당문학 문정(文挺)의 후손이다. 1462년(세조 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겸 예문에 제수되었다. 1466년 예문관대교 로서, 발영시(拔英試)에 응시, 시부에서 최우수의 실력을 보여 세조의 신임을 얻고, 선전관(宣傳官)에 발탁되었다. 이듬해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북정록 北征錄'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예종 때는 예조정랑, 승문원교리로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469년(예종 1) 알성시에서 시부에 장원하였다. 1474년(성종 5)부터는 사헌부로 옮겨, 장령, 집의 등을 역임하면서 관기확립에 힘쓰고, 민폐를 시정하는 데 노력하였다. 특히, 포도수령(捕盜守令)의 논상법(論賞法)을 성문화하였고, 조세부과에 있어 연분법(年分法)의 불합리성을 시정하였다. 1475년 사은사(謝恩使)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77년에는 왜인의 동태에 유의할 것을 경고하였다. 이어서 임사홍(任士洪)의 횡포를 견제하였고, 내수사 장리(長利)로 인한 민폐를 시정하였다. 그뒤 승정원으로 옮겨 성종의 신임을 받으며 국정을 보필하였는데, 1479년 왕비 윤씨(尹氏)를 폐하려 하매 그 불가를 간하였으나,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 은, 당시 현직 승지 라고 하여 직첩을 회수하기도 하였다. 같은해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다스리고, 이어서 동지중추부사, 호조참판, 예조참판, 형조참판,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83년 '강목신증 綱目新增'을 왕명으로 찬술하였고, 1486년에는 대사헌으로서 유자광(柳子光)을 탄핵하였다. 그뒤 임사홍 일파와 어울려 대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