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신희(新稀). 부윤 자종(自宗)의 아들이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1396년(태조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봉상시녹사를 거쳐, 직예문춘추관수찬관(直藝文春秋館修撰官)이 되고, 이어 집의, 동부대언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태종은 그가 간관(諫官)으로서 의연한 자세로 일을 말하는 것을 보고 손을 잡고 치하하였다 한다.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조심스럽게 처사하여 신임을 받아 예조판서,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423년(세종 5)에는 대사헌으로서 조계종(曹溪宗) 등 불교 7종파를 선(禪), 교(敎)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 받았다. 1425년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가 되었다가 한때 천안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곧 유배에서 풀려 형조, 병조의 참판을 거쳐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그뒤 대사헌, 형조판서, 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사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보았으며, 1445년에 좌찬성이 되어 70세로서 궤장(○杖)을 받았다. 이어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449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영의정으로 있던 1451년(문종 1)에 문종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치사(致仕)하였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년간 문안에 사알(私謁)을 들이지 않았고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1454년에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숙종 때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志', '진양연고 晋陽聯藁'가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