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재(淸齋). 강생(剛生)의 아들이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온서직장(司○署直長)이 되었고, 1436년(세종 18)에 친시문과에 급제하였다. 기주관(記注官)으로 있다가 함길도절도사 김종서(金宗瑞)가 북방에 육진을 개척할 때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야인(野人)에 대한 안무책(安撫策)으로 남쪽지방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할 것을 절도사에게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447년에 평안도판관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448년에 도체찰사(道體察使)의 종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 위하여 일으킨 계유정난 때 김종서 등이 살해되자, 크게 분개하여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은밀히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등과 내왕하면서 단종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세조 2)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 자살하였다. 일찍이 세종과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을 뿐 아니라, 성삼문 등과 함께 단종을 보살펴달라는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았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주 숙모전(肅慕殿)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