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김제신(金悌臣)
  • 연안김씨(延安金氏),  출생~사망 : 1438 ~ 1499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순경(順卿). 아버지는 내자시윤(內資寺尹) 해이다. 1462년(세조 8)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에 보임되었다. 그러나 곧 병으로 여러 해 동안 은퇴하였다가 완쾌된 다음인 1464년에 세조의 호의로 풍수문(風水門)에 선발되었고, 이어서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좇아 군관이 되어 토벌에 참여하였다. 1472년(성종 3) 정언이 되고, 아울러 예문록(藝文錄)에 선발되어 경연에서 활동하였으며, 재상 신주(辛柱)의 탐오함을 탄핵하였다. 1477년 지평을 거쳐 장령에 올라, 양성지(梁誠之), 김국광(金國光), 임원준(任元濬) 등을 탄핵하여 관기확립과 풍속교정에 힘썼다. 1481년 경상도에 경차관(敬差官)으로 파견되어, 파종과 구황업무를 관장하였다. 이어서 집의로 승진하고 함경도 경흥에 파견되어, 수령과 만호의 불법적인 처사를 적발하였다. 1485년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세자의 교육에 힘썼고, 이듬해에 다시 함경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유민쇄환을 위하여 활동을 폈고, 그 이듬해에는 선위사(宣慰使)로 일본사절을 접대하였다. 그동안의 공로로 이조참의에 올랐다. 1489년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 좌부승지, 좌승지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에 도승지가 되어 국왕을 충실히 시종하였다. 이어서 경기관찰사가 되어 민정을 총괄하였고, 다시 내직으로 옮겨 병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관기확립에 힘썼다. 특히 왕자와 옹주들의 호사한 저택 풍조를 신랄히 비판하였다. 이듬해 정조사의 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는데, 사행중 조공품을 도난당하여 고신(告身)을 환수당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하여 한성부우윤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496년 다시 대사헌에 제수되어 언론기능의 강화와 기강 확립에 힘썼는데, 당시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묘(私廟)를 세우고자 하자 이를 반대하였다. 이듬해 예조참판으로 전임되었고, 그 이듬해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金宗直)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1499년 전주부윤으로 나가 농정과 교육에 힘쓰다가 현지에서 죽자, 사민(士民)들이 거리에서 곡하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폐비입묘(廢妃立廟)를 반대하였다고 하여 추형되었다. 성품이 관유하였으며, 행동함이 맑고 근실하여 군자의 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