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정식(鄭軾)
  • 나주정씨(羅州鄭氏),  출생~사망 : 1407 ~ 1467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빙보(憑甫). 가신(可臣)의 6세손으로, 자신(自新)의 아들이다. 이극근(李克勤)의 문인이다. 1432년(세종 1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 장령을 역임하였다. 1443년 예조좌랑으로 있을 때 함길도에 심한 기근이 들자 경차관(敬差官)으로서 도를 순시하고 돌아와 조정에 상황을 보고한 뒤 간신들의 농간으로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또한, 1445년 이조정랑 때에도 낭청 연회 문제로 인하여 다시 삭직당하였다. 1446년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죽자 국장도감판관(國葬都監判官)이 되어 능실의 제도를 맡아보았으며, 그 이후 의정부검상과 사인을 지냈다. 1450년 정이한(鄭而漢)의 종사관으로 의주성 축성을 감독하였고, 1453년(단종 1)에는 지사간원사로 발탁되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3등으로 봉하여졌으며, 1458년에는 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460년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곧 형조참판이 되었으며, 다시 함길도관찰사로 전천(轉遷)되었다. 1461년 겸 함흥부윤이 되었을 당시 모련위(毛憐衛)야인을 정벌할 때 그가 병기의 조달을 모두 관장하여 창졸간에 판비(辦備)하였고, 따로 군사 1, 000기(騎)를 거느리고 아치랑귀(阿赤郞貴) 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돌아왔다. 그 공으로 인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초자(超資)되었다. 1462년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곧 중추원부사가 되었으며, 다시 판한성부사로서 수장(守將)이 되었다. 1463년 지중추원사에 제수되었다. 1465년에는 경상, 전라도군적사(慶尙全羅道軍籍使)가 되었다가 곧 의금부제조가 되었으며, 1466년 동지중추원사로 임명되었다. 조선 초기의 군사제도와 군적정리에 많은 공을 세웠다. 시호는 경무(景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