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 조숙기(曺淑沂)
  • 창녕조씨(昌寧曺氏),  출생~사망 : 1434 ~ 1509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문위(文偉). 현령 안중(顔仲)의 아들이다. 1475년(성종 6)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어(射御)에 능하다 하여 선전관에 발탁되었으며, 1478년 이조좌랑 재직중 평안도에 파견되어 민심을 위유하였다. 환경(還京)하여서는 복명하기까지에 걸쳐 견문한 산천의 험이(險夷), 도로의 원근, 방수(防守)의 허실, 변민의 휴척(休戚) 등에 관한 것을 상소하였다. 1479년 건주위(建州衛)여진을 정벌할 때 도원수 윤필상(尹弼商)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였고, 이듬해 적진 깊숙이 들어가 독전(督戰)한 공로로 3계(階)가 특진되고 홍문관부교리에 제수되었다. 1484년 순천군수 재직중 문무겸재하여 쓸만하다는 좌의정 윤필상의 천거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사헌부집의 등을 역임하고, 그해 12월에 이성(利城)에 파견되어 수령, 만호의 불법을 적간(摘奸)하였다. 1486년 강릉부사, 의주목사, 1488년 진주에 있는 자식의 혼사에 내왕하면서 관마(官馬)를 청하여 사용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면직될 때까지 관우(館宇)와 난장(欄墻)을 견고하게 보수하는 치적을 올렸다. 1489년 강무(講武) 때에 위장(衛將)이 되면서 고신(告身)을 환급받았고, 1491년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고 뒤에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1500년(연산군 6)에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1년에 다시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1503년 노병으로 체직되었다. 1507년(중종 2)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재직중 앞서 경주부윤 재직시에 경주부 근처의 넓은 토지를 점유하여 농장을 이루고, 경주부민을 부려 경작한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비변책을 건의하고, 노년의 대부분을 병영(兵營) 진수에 바치는 등 국방에 공헌하였으며,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