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맹언(孟彦). 광성군(廣城君) 극감(克堪)의 아들이다. 1477년(성종 8)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대사간으로 특채되고, 1485년에 이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광양군(廣陽君)의 봉호를 받았다. 1494년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 성종의 국장의례 및 능(陵)축조를 담당하였으며, 이어 한성부판윤, 호조판서를 거쳐 1496년(연산군 2) 순변사로 여진족의 귀순처리와 회유책의 강구를 위하여 북방에 파견되었다. 1497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이듬해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 및 그 제자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거쳐 예조판서, 지경연사(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1503년 인정전에서 열린 양로연(養老宴)에 참석, 어사주를 회배(回盃)할 때 어의(御衣)에 술을 엎지른 실수로 연산군의 분노를 사서 무안에 부처되었다가 다시 온성, 평해에 이배되었다. 이듬해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비(尹妃)를 폐위할 때 극간하지 않았고, 이어 형방승지로서 윤비에게 사약을 전하였다 하여 다시 거제에 이배되던 중 곤양군 양포역(良浦驛)에서 자살의 명을 받고 목매어 자결하였다.